8월 20-21일 1박2일동안 진행되었던 2023 고려대학교 해커톤 'HacKUthon: who is the cube master'에 기획자로 참가한 후기를 남겨보려고 한다.
사실 이번 해커톤에 처음부터 참여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스타트업 씬에 있으면서 질리도록 기획 활동을 했었고, 지금은 잠시 씬에서 발을 빼고 내 기술 역량을 키우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크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개발 공부를 한 후에 개발자로 나간다면 모를까, 기획자 포지션으로는 더더욱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추가 모집 기간에 지인이 적극 권유(?)를 해서 다시 참가 신청 공고를 찬찬히 읽어보니 꽤 관심이 갔고(역시 한 번 창업 씬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건가...) 규모도 작은 편이라 부담없이 나갈만 해서 참가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해커톤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으니 나중을 위해 경험삼아 놀고 오자는 생각이었다.
해커톤 본 대회 전, 8월 17일 목요일에 사전 팀빌딩 행사를 진행했다. 팀빌딩은
- 팀장 PR
- 팀장이 나머지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팀장 찾아가기
- 팀 정원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팀장을 찾아가게 된 경우, 팀장이 그중에서 선택
-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랜덤 배정
위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팀장으로 지원했는데, 팀장 PR 때 자료를 준비해도 된다고 안내받긴 했으나, 1분 발표에서 굳이 자료까지 만들어야하나 해서 준비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 빼고 다들 준비해왔다는... 그래도 나름 잘(?) 내 창업 경험과 VC 인턴 경력을 어필하며 내 소개를 했고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줬다ㅠㅠ 2명을 내보내야했는데 F에겐 너무나도 마음 아픈 일이었다...
사실 나중에 팀원들이랑 이야기하면서 다들 동의했던 내용이 있는데, 이번 해커톤이 유독 차가웠(?)다고 한다. 참가자들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랬던 것 같다. 팀장 PR 때부터 나와 다른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제가 1등 시켜줄게요', '우리 팀의 목표는 수상입니다'라는 식으로 소개를 했는데 꽤나 당황스럽고(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얘기한다고...?) 신기했다. 팀장들도 다들 개성이 넘쳐서 어느 단 한 사람도 캐릭터가 서로 겹치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나 다른 사람 사람들이 모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달랐다. 대부분의 팀장들과는 달리 나는 이번 해커톤에서 굳이 수상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프로덕트를 만들고 경험과 추억을 쌓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관으로 삼았고,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와준 것 같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팀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우리팀은 나를 포함해서 기획자 2명, 프론트 1명, 백엔드 1명, 디자이너 1명 이렇게 구성되었고, 그 중 개발자 2명은 내 지인들이었다. 다들 일단 모두 mbti E에다가 셩격도 좋고 각자 영역에서 능력도 출중하며, 어느 하나 버스타는 인원 없이 다들 1인분 이상의 분량을 해주었다. 특히 아이디어 기획 단계에서부터 기획자 2명이서만 의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자와 디자이너 모두가 각자 자기 의견을 내고 기획에 참여해주어서 기획자 입장에서는 매우 수월했다. 보통은 이렇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인데, 우리팀 같은 경우에는 의사소통이 매우 원활하게 잘 진행되었다. 해커톤 끝나고 1박2일 밤을 새고 거의 폐인 상태로 뒤풀이를 갈 정도면 다들 친화력 미친듯
이번 해커톤의 주제는 '소확행'이었다. 4시간에 걸친 아이디어 회의를 통해 우리는 취향 반영 랜덤 배송 정기구독 서비스 'Soppo'를 기획하였다. 그리고 저녁쯤부터 3분의 멘토님들께서 돌아가면서 멘토링을 해주셨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멘토링을 하면 할수록 우리와 달리 멘토님들께서는 우리 아이디어에 대해 약간 회의적이었고 비슷한 컨셉의 다른의견들을 제시해 주셨다. 이제 빨리 프레임워크 만들고 디자인하고 개발에 들어가려고 했던 우리는 멘토링을 받으면 받을수록 계속 진행이 더뎌졌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해커톤의 수상 여부는 사실 첫 몇 시간 내에 진행되는 아이디어 기획 단에서 결정되는 것 같다. 이 랜덤 배송 구독 서비스 아이디어는 내가 낸 아이디어였는데, 내가 생각해낸거다보니 멘토분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때도 나는 계속 이것을 고수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아이디어 단에서부터 애매한 피드백이 있을 때 이미 한 거 아깝다는 생각을 버리고 과감하게 아예 새로운 아이디어로 시작하는 것도 고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멘토링 때도 우리 아이디어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나는 발표 ppt를 만들면서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해커톤 후반부에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한창 프로덕트를 만들동안 기획자들은 발표 ppt를 만들게 되는데, 우리 서비스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할 때 개연성과 설득력이 너무 부족했다. 나는 해커톤은 처음이고 기존에 벤처캐피탈에서 기업들의 IR 자료를 오히려 더 많이 봐왔는지라, 항상 painpoint -> solution으로 이어지는 구성만 봤었다. 그런데 일단 우리 서비스는 painpoint 가 엄밀히 말해서 존재하지 않았다. 불편한 점을 해결해주는 서비스라기보다는 부가적인 가치를 제공해주는 서비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일단 멘붕이 왔다. 또한, '사람들이 우리 서비스를 돈을 주고 사용해야 하는 이유', '우리 서비스가 근본적으로 제공해주고자 하는 가치' 등을 생각해보았을 때, 그런 것들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사실 이것들은 명백히 기획자인 나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아이디어 회의 때부터 이런 것들을 정의하고 짚고 넘어갔어야 하는데 '아이디어의 참신함'에 너무 매몰되어 이런 것들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ppt는 어떻게든 스토리를 만들긴 했으나 끼워맞추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이번 해커톤에서 하나 또 느꼈던 것은 해커톤 발표 ≠ IR 발표라는 것이다. 창업과 해커톤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해커톤에서는 '제시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해커톤 자체는 처음인지라 발표를 할 때 제시어로부터 시작하는 스토리텔링이 어색했는데, 해커톤에서는 사실 괜찮은 것이었다. 진짜 기업 IR이 아닌 대학생 해커톤인데 내가 너무 '그래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뭔데?', '사람들이 이걸 왜 사는데?', '그래서 우리가 왜 투자해야하는데?' 등의 질문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 같다. 발표를 IR 처럼 구성하려던 나와 그냥 제시어로부터 스토리텔링해서 시작하려는 팀원들 사이에서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해커톤은 그냥 저렇게 발표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도 괜찮았다. 다른 팀들도 대부분 그런 식으로 발표를 진행했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4등을 하게 되었고, 총 3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사실 입상 때문에 참가한 건 아니어서 어쩌다 수상을 하게 되어 기뻤지만, 한편으론 훌륭한 팀원들과의 훌륭한 팀워크에 비해 결과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1박2일 동안 정말 뜻깊은 경험을 한 것 같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맺은 것 같다. 다음번에 해커톤에 또 참가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때는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다음번에 또 하게 된다면 일단 기획자로는 안할듯,,,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