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부터 5월까지. 세 달 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벤처캐피탈 인턴을 마쳤다. 내 지인들은 어딘지 다 알테지만 혹시 모르니까 여기다가 사명은 안쓸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회없는 결정이었고, 앞으로의 진로 설계를 함에 있어서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경험이었다.
작년 여름부터 스타트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창업학회도 하고, 직접 창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는 아니지만)도 해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전까지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벤처캐피탈리스트라는 직업을 알게되었고, 성향상 스페셜리스트보다 제너럴리스트에 가까운 나는 그 VC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내 전공을 살려 개발자나 보안전문가의 길을 가는 것과 VC의 길을 가는 것은 너무나도 정반대의 길이었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했기 때문에 2-2 말쯤부터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민이 정말 많았다. 개발이나 보안쪽은 주변에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지인이 많았지만, VC는 워낙 생소하기 때문에 정보가 많이 없었다.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4학년 말 졸업할 때까지도 계속 이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서 특히 이공계열치고는 꽤 빠른 시기인 하지만 3-1을 휴학하고 인턴을 하면서 미리 경험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인턴지원서를 한 7군데 정도 낸 것 같다. 당연히 나는 투자나 경영과 관련된 스펙이 단 하나도 없었고 그나마 창업경험과 창업 학회 이 두 개가 나의 유일한 관련 스펙이었기 때문에 지원하면서도 1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되면 하고 안되면 그냥 학교 다니지 뭐 라는 마인드였다. 나머지는 다 광탈이었는데 딱 한 군데만 합격했다.
인턴으로 일하면서 리서치는 물론이고, 투자 검토 미팅 참여, 인재 관리, 커뮤니티 활성화 등 다양한 일을 했다. 그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고 도움이 됐던 활동은 아무래도 IR 미팅이다. 내가 다녔던 곳은 초기 단계에 투자하는 VC이기 때문에 다른 VC에 비해서 엄청나게 많은 수의 창업팀을 검토하고 IR을 진행한다. 대학생 창업때는 아이템의 스펙트럼이 기껏해야 플랫폼, 기술이었는데, 많은 수의 창업 팀을 만나다보니 이런 분야로도 창업을 할 수 있구나, 이런 아이템도 있구나, 이런 백그라운드를 가진 창업가도 있구나 하는 등 정말 많은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또 투자 집행을 하기 위한 심사역님들의 회의에서도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는데, 특히 대표님의 말씀을 들으면 역시 경험과 연륜은 무시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와 시야를 가지고 계셨다. 창업가들, 우리 회사 대표님, 그리고 심사역님들이 몇 십년간 쌓아온 인사이트를 내가 옆에서 간접경험할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회사 복지도 매우 좋았다. 보통 이런 새로운 집단에 소속되게 되면 빌런같은 사람이 한 명은 있기 마련인데 정말 다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 VC가 원래는 금융쪽이라 굉장히 보수적인 집단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회사는 다들 창업가 출신이고 하는 일도 약간 스타트업에 가까워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인턴을 너무 편하게 해서 나중에 취직하면 적응 못하는거 아닌가…
그래서 3개월간의 인턴생활 후 내린 결론은 전공 공부를 더 하자였다. VC는 매력적인 직업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학부 졸업 후 바로 VC로 취업하기에는 VC로서 내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CPA 자격증이 있거나 MBA를 했다거나 IB에서의 경력이 있으면 경영 차원의 value를 창업자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고, 이공계 산업 경력이 있다면 기술적인 부분에서 value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회사에 있었던 미국 대학을 나오신 한 심사역님께서는 우리 포트폴리오사가 해외 법인을 세워야 하는 등 외국으로 진출할 일이 생길 때 자신의 영어 실력과 백그라운드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겨우 학부 졸업생일 나는 아무런 가치를 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학부 졸업 후 바로 VC로 취직하는 것에 회의적인 또다른 이유는 이번에 인턴을 하면서 느낀건데 그 어떤 직업들보다도 벤처캐피탈리스트는 경험치와 인사이트가 중요한 것 같다. 우리 회사에서도 다 같은 심사역분들이지만 연차에 따라 질문의 퀄리티, 사고와 판단력에 차이가 있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투자라는게 수학이나 과학처럼 정량적으로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변수나 운에 따라 그 결과가 확 달라지는데, 결국 경험치, 얼마나 많은 창업 팀들과 대표님들을 만나보고 이 씬에서 얼마나 많이 굴러봤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 같다고 느껴졌다.
나중에 VC를 하더라도 개발이나 보안쪽으로 커리어를 쌓다가 IT 또는 보안 백그라운드를 가진 VC가 되는게 좋은 것 같다. 사실 이런 백그라운드가 있다면 VC 외에도 컨설팅 펌이나 IB로 넘어가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그리고 언젠가는 창업을 제대로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도 유효하다. 어차피 결국 전공 공부를 더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낸거면 인턴 했던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인턴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졸업할 때까지도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하고 양쪽에 미련을 두면서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고, 그럼 어느 한 쪽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이렇게 좋은 인연들도 못맺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퇴사 직후에 들었던 생각을 끄적인 것이고, 지금부터는 그로부터 한두 달 후 디벨롭된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 인턴 당시, 우리 포트폴리오사들을 산업 분야별로 카테고리화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의료, 펫, 커머스, 유통, 농업, AI 등으로 분류를 했는데, 그중에서 특히 AI 분야로 분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포트폴리오사 중 딥러닝 기술을 활용한 음성 마켓플레이스 스타트업이 있었는데 이 회사를 커머스로 분류해야할지, AI 스타트업으로 분류해야할지 애매모호했는데 이런 것들이 꽤 있었다. 제조업이 아닌 웬만한 IT 스타트업들은 기술에서 인공지능이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적용 산업과 기술을 나누어 카테고리 작업을 하였다. 적용 산업에는 의료, 펫, 커머스 등이 있을 것이고, 기술에는 AI, 블록체인 등이 있는 것이다. 위의 예시인 음성 마켓플레이스같은 경우에는 AI 기술을 사용하는 커머스 회사로 분류하였다.
예전에는 알파고, ChatGPT와 같이 온갖 뉴스에서 떠들고 술렁여야 겨우 실감했는데, 산업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타트업 씬에서 이렇게 인공지능이 온갖 곳에 활용되는 것을 직접 경험하니 AI 기술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활용도가 높고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보였다. 또한, 최근에 알고리즘 덕분에 SNS에 Midjourney를 이용한 AI 그림이 계속 뜨길래 자주 접하게 되었는데,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고 여기어져 왔던 창작과 예술 분야에까지 인공지능이 침투하는 것을 보고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공지능 기술을 일상에서 계속 접하다보니 그 기술의 원리부터 깊이 있게 공부해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컴퓨터 분야가 워낙 방대하다보니 개발, 보안 중 무엇을 팔 지 고민이 많았는데 아예 인공지능으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여기에 내 전공인 보안을 살려서 인공지능 보안에 대해서 공부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 인공지능과 AI보안에 대해서 공부해봐야겠다.